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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이야기

경복고의 동아리 해체 공고가 황당한 이유

어제 황당한 기사를 봤습니다. 서울 경복고가 학생들을 향해 모든 동아리를 해체하라는 공고를 내렸다는 겁니다.

모든 동아리를 해체하라니... 너무 황당해서 기사를 자세히 보니 발단은 한 동아리의 가혹행위 때문이더군요. 바로 역도부 동아리 선배들이 후배들의 허벅지와 엉덩이 등을 때리고 속옷을 벗긴 채 사진을 찍는 등 두달 동안 폭행과 가혹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조치로 경복고에서는 지난 7일 역도부의 가혹행위로 '학교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이유로 교내 모든 동아리를 해체하라며 다음과 같이 공고했습니다.

-본교의 기존 모든 동아리(써클)의 즉각적인 해체를 명한다
-오늘 이후 동아리와 관련된 어떠한 모임이나 활동을 하면 교칙에 따라 엄격하게 처벌한다
-새로운 동아리 결성 절차와 활동 사항은 추후 공고한다

언론 보도에 나온 학교 관계자는 "교육과정 개편으로 동아리 활동이 중요시되고 입학사정관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역도부 사건이 발생해 학교 쪽의 강력한 조처가 필요했다"면서 "3월부터 새 동아리에 대해 엄정한 심사를 할 예정이며,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놀자며 만든 동아리들도 학구적인 방향으로 바꿔나갈 것"이라고 말했더군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경복고등학교의 모습. 출처 : 경복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 관계자의 말은 학교 입맛에 맞는 동아리만 허가하겠다는 선전포고였습니다. 공고문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고 학교 관계자의 발언을 봐도 황당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동아리를 없애겠다고요? 물론 이번 가혹행위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강경책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 동아리의 잘못을 연대 책임으로 돌리려는 학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동아리에 대한 징계와 재발 방지를 하면 될 일인데 이것을 침소봉대 해서 모든 동아리를 해체하겠다는 것은 군사정권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일입니다.

사실 저는 경복고의 이번 조치와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다. 10여 년 전 경복고에서 졸업장을 받은 졸업생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학창시절에 동아리 활동을 했었습니다. 학창시절의 추억 대부분이 이 동아리 활동에서 생긴 겁니다.

더운 여름 방학에도 학교에 나와 축제 준비를 하고, 후배들에게 동아리에 관련된 기술을 전수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요즘도 가끔 그때 추억을 떠올릴 정도로 고등학교 시절 동아리 활동은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경복고등학교 홈페이지 캡쳐화면.

그런데 제 모교가 그 추억을 모조리 앗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제 동아리의 문제가 아니라 수십 개의 동아리 중 한 동아리의 잘못을 핑계로 말입니다.

이번 일은 1차적인 책임은 동아리에 있지만,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을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못한 학교의 책임도 큽니다. 학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역도부에는 지도 교사가 없다고 하더군요.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을 신경써야 할 학교와 교사의 책임을 다 하지 못한 측면도 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학교 측이 마음에 들지 않는 동아리를 뿌리 뽑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경복고의 동아리는 학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경복고 졸업생의 땀이 녹아 있고 추억이 살아 있습니다. 학교에 요구합니다. 그렇게 동아리를 해체하고 싶다면 재학생들은 물론 졸업생들의 뜻까지 물으십시오. 이 사안이 모든 동아리를 해체할 사안인지, 아닌지.

제 모교가 책임을 회피하고 학생들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경복고 홈페이지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복고등학교'라는 글이 떠 있더군요. 제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제 모교가 역사와 전통에 먹칠하는 행동을 멈추기를 바랍니다.

양을쫓는모험(박정호) 트위터 주소 -> http://twitter.com/jungho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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