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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이야기

협상 직후 들이닥친 경찰, '공정한 사회'는 없었다

3시간 동안 노사 협상을 한 뒤 추가 협상을 약속하고 일어선 노조 지부장. 그는 조금 더 협상을 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지 못했습니다.

지난 21일부터 공장 점거 농성에 들어갔던 경북 구미에 위치한 반도체 제조업체 KEC 노조 지부장이 30일 밤 회사 화장실에서 분신을 시도했습니다. 공장을 에워싸고 있던 경찰이 노사 협상이 결렬되자 공장 안으로 진입해 KEC 노조 지부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노조 지부장이 분신을 시도한 겁니다.

그는 협상장 옆 화장실로 몸을 피했지만, 경찰이 문까지 깨고 들어오려고 하자 주머니에 있던 시너를 꺼내 몸에 끼얹고 분신을 시도했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는 하지만 노조 지부장은 안면 3도 화상을 입었고 흡입부 감여 등도 우려된다고 합니다.

경찰은 회사의 피해가 막심한 상황에서 협상 타결 가능성이 낮아 발부 받은 체포영장을 집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과잉 진압을 했다는 비난은 피하지 못할 겁니다. 

민주노총과 민주당 등 야 5당은 KEC 김준일 노조 지부장 분신 사태와 관련 31일 오후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게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다. 촬영 : 오마이뉴스 박상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동안 경찰은 노사 협상이 진행될 때는 노조 지도부를 체포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노사가 3시간이나 대화를 나눴고 추가 협상까지 약속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관례마저 깨고 농성장 안으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밤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농성 중인 노조원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노조는 파업을 불러왔던 타임오프제 시행 등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상태였고 파업 노조원에 대한 징계·고발과 직장폐쇄 철회 등을 놓고 노사가 협상 중이었습니다. 충분히 노사 간 대화로 풀 수 있는 문제였죠.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상식적으로 노사의 협상이 진행 중이라면 기다리는 게 이치에 맞는데됴 경찰은 노사 협상 직후 노조 지도부 체포에 나섰습니다. 노조원들은 사측과 경찰이 노조 지도부 체포를 위해 함정을 팠다는 주장까지 할 정도입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이재정 국민참여당 대표,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31일 오후 한강성심병원 앞에서 KEC 김준일 노조지부장의 분신 사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촬영 : 오마이뉴스 박상규

관례를 깬 과잉 진압은 전국적인 반발과 분노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어제 노동계와 민주당 등 야 5당은 노조 지부장이 입원하고 있는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명박 정부의 시민 억압정책이 분신 사태를 불렀다"며 공개적으로 조현오 경찰청장의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트위터에서도 경찰의 과잉 진압 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쌍용자동차 파업 진압이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조현오 경찰청장이 취임한 이후 경찰은 약자들에게 더 가혹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지나친 성과주의가 무리한 진압으로 이어진 요인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경찰에게는 노조가 파업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이나 공장 안에서 외치는 노조의 주장은 그저 불법시위로 보일 뿐입니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3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촬영 : 오마이뉴스 최지용

'공정한 사회'는 없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시간만 나면 강조하고 있는 '공정한 사회'. 이상하게도 '공정한 사회'가 회자된 이후 우리 사회는 더욱 더 '불공정한 사회'를 향해 가는 것 같습니다. '공정한 사회'라는 주장만으로 약자를 배려하고 대화를 강조하는 대신 법치만 외치는 사회가 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노조 지부장이 분신하던 날 서울광장에서는 '소외된 노동과 함께하는 전태일 40주기 기념문화제'가 열렸습니다. 40년 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외치며 분신했건만 21세기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멉니다.  제2, 제3의 전태일이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픕니다.

'공정한 사회'라고요? 좋습니다. 정부가 이번 KEC 노조 지부장의 분신 시도 정국을 어떻게 수습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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