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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이야기

소련군의 생환 축하 파티가 보여주는 행복

늦은 밤 울려 퍼지는 흥겨운 노랫소리와 신나는 음악. 손뼉을 치며 빙글빙글 춤을 추는 사람들. 춤을 추지 않는 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여 음식을 먹고 '방귀로 촛불끄기'같은 게임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진한 아이라인을 그려넣는 여성도 보인다.
자,
'파티 타임'이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파티는 없다. 누가 뭐래도 신나게 즐기는 시간이다. 인생의 걱정은 모두 날려버리자. 몸을 흔들고 맘껏 먹고 마시자. 촛불 앞에서 엉덩이를 까고 방귀를 뿜어내보자.

하지만 화면을 통해 파티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즐겁지 않다. 괴롭다. 불편하다. 기쁨 대신 슬픔이, 웃음보다 눈물이 앞선다. 신나는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곳이 사실은 치열한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이 걱정이다.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나 내일 다시 볼 수 있지? 모레는, 다음 주에는, 다음 달에는, 누가 살아남는 거야? 아니, 정말 살아 남는 사람이 있기는 해?

영화 포스터.

섬뜩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의 파티라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춤추고 노래할 수 있을까.

"여기 사람들은 자기들이 죽을 거라는 걸 알아. 그래서 살아 돌아오는 날은 보너스야."

의문은 춤을 추던 소련군 바실리 자이체프의 설명으로 해결된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2001)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을 소재로 만든 영화다.

영화는 뛰어난 저격술로 독일군 수백 명의 목숨을 빼앗았던 실존 인물 바실리(주드 로)의 이야기로 전쟁의 참상을 그려낸다.

바실리가 전장에 투입되면서 지급받은 무기는 총알 뿐. 바실리는 총알을 들고 총을 든 다른 군인을 따라 나선다. 2인당 소총 1정, 2인 1조다. 결과는 예상대로다. 막강 화력을 자랑하는 독일군을 향해 달려가다가 쓰러지는 소련군의 진격 장면은 처참하다.

그리고 독일군의 총을 피해 뒷걸음질쳤다가 소련군 기관총에 맞아 숨지는 소련군의 모습은 슬프다. 총소리와 비명소리 그리고 쓰러지는 병사들. 소름이 돋는다.

그래서다. 살아남은 자들이 기뻐할 수밖에. 병사들이 밤마다 생환 축하 파티를 벌이는 광경은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내는 모습이다. 생명을 연장한 밤, 세상에 이렇게 기쁜 파티는 없다.

영화는 저격수 바실리와 독일군 저격수 코니그(에드 해리스)의 대결에 초점을 맞췄다.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눈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는 영화 내내 긴장감을 준다. 그리고 바실리와 타냐(레이첼 와이즈)의 숨막히는 사랑도 나온다.

사실 영화 속 파티 장면은 1분 남짓 정도지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축하하는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1942년 겨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독일과 소련군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여름부터 시작된 전투가 1943년 2월 독일군이 항복할 때까지 이어지면서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소련군의 평균 생존 시간이 24시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전투 초기는 독일군이 우세했다. 독일은 제6군과 제4기갑군을 비롯해 이탈리아, 루마이나, 헝가리 병력과 함께 석유공급로인 스탈린그라드를 몰아붙였고, 소련군은 엄청난 손실을 보며 볼가강가까지 밀렸다.

독일군을 향해 돌격하는 소련군. ⓒ 파라마운트 픽쳐스


그러나 곧 끝날 것 같았던 전투는 11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 소련군이 독일군을 포위하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맹추위에다 보급품 부족을 겪은 독일군은 사기가 떨어졌고 구조대도 소련군에 격파 당하면서 이듬해 2월 2일 독일군 9만 1천여 명은 항복했다.  

우리도 하루 하루 전투를 치러내고 있다. 공부라는 전투, 직장이라는 전투, 인간관계라는 전투. 순간 순간이 전투다. 각자 '악전고투'하고 있다.

하지만, 파티는 없다. 그렇게 힘든 전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도 별로 즐겁지 않다. 또 다른 걱정이,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다시 전투로 밀어낸다. 행복은 순간 순간의 총합이라는데 우리는 순간 순간 전투만 벌이고 있으니 살아 남아도 별로 기쁘지 않다.

기뻐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영화 속 바실리가 충고한다.

"차 한 잔, 담배 한 개비가 작은 축하파티가 되는 거지.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마지막 밤일 수도 있으니까.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이 여기선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지."

스탈린그라드 생환 축하 파티가 끝난 다음날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은 없다. 또 다시 오늘의 파티를 즐겨야 하니까. 지금 춤을 추지 않으면,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마시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박정호 기자 트위터 -> http://twitter.com/JUNGHOPARK 우리 트친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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