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 마리나 베이 샌즈를 바라보며 걸었다. 한낮 더위에 지친 여행자들이 카페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아이스 커피를 마시며 마리나 베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리라. 플러튼 베이 호텔의 깔끔한 로비를 둘러보고 꽃이 핀 발코니를 구경했다. 모든 게 규칙에 따라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마치 연극 무대를 걷는 것 같았다.

그때 물 위로 배가 잔잔한 물살을 가른다. 아담한 유람선이었다. 꽁무니 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카메라를 들고 마리나 베이 샌즈를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배는 한 척만 있는 게 아니었다. 왼쪽 다리 아래 또 한 척의 배가 살금살금 미끄러지듯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배는 어디서 오는 걸까?'


클락 키에서 마리나 베이로 항해한 유람선


MRT를 타고 클락 키 역에서 내렸다. 밖으로 나와 마주친 모습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싱가포르 강은 헤엄쳐 쉽게 건널 수 있을 것 같은 좁았다. 강변에 서 있는 파스텔 색 건물들이 이색적이었다.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색칠한 것처럼. 작은 선착장에는 마리나 베이에서 봤던 유람선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갑자기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났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미처 알아 채지 못했던 장면이 보였다. 팽이를 닮은 장치가 하늘로 솟구쳤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번지점프가 아니라 땅에서 하늘로 날아가는 번지점프 같았다. 보기만해도 아찔한 놀이기구에 올라탄 여성들이 소리를 지른 것이다.  



"우와~재밌겠다!"

평소에도 놀이기구 타는 걸 좋아하는 아내의 탄성이었다. 앗, 이때 필요한 건 바로 '스피드'였다. 못 들은 척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클락 키(Clarke Quay)는 영국 총독의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과거 싱가포르 강을 따라 교역되던 상품들이 이곳 클락 키 창고들에 보관됐다고 한다. 클락 키를 기준으로 오른쪽 부두 보트 키((Boat Quay)와 왼쪽 부두 로버트슨 키(Robertson Quay)는 싱가포르 강의 교역이 활발하던 시기에 번성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예전의 부두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 지역들은 쇠퇴해 갔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강변이 개발되면서 이 지역은 다시 태어났다. 아름다운 레스토랑과 핫한 술집들이 생겨나면서 활기를 띄게 된 것이다. 지금은 싱가포르의 명소가 됐다. 특히 음주가무를 사랑하는 여행자들에게!





하지만 아직은 이른 시간인지 대부분의 가게들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문을 아직 열지 않은 곳도 있었다. 대신 산책하기에는 좋았다. 마치 예쁜 놀이동산 사이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명소리도 간간이 들리니까. 밤에 다시 오자는 마음을 먹고 다시 MRT역으로 향했다. 

다음 행선지는 차이나타운. 그곳에 있는 여행사에서 각종 티켓을 구매하는 게 싸다고 했다. 우리도 나이트 사파리 티켓을 사기 위해 꼭 들러야 하는 코스였다. 헤이즈가 아침부터 해를 가리고 있었지만, 더위는 가리지 못했다. 다시 한번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가볍게 해야 했다. 주변 패스트푸드점에서 시원한 탄산음료와 프렌치 후라이를 먹었다. 늘어졌던 몸에 활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역시 당 충전의 효력은 금세 나타났다. 

"홍콩에 와 있는 것 같아."

그랬다. 싱가포르 차이나타운은 꼭 싱가포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홍콩의 시장 골목처럼 중국식 음식을 파는 가게들과 노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중국에서 맡아봤던 향이 계속 코를 찔렀댔다. 바쁘게 걷는 사람들이 많아서 두리번 거리는 관광객들이 튀어 보였다. 차이나타운 뒤로 고층빌딩이 희미하게 보였다. 입구가 많아서 헷갈렸지만, 다행히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여행사를 잘 찾아갔다. 물론 최적의 경로 탐색에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티켓 구매에 성공했다. 게임 미션을 '클리어'한 듯 뿌듯했다.


늦은 오후, 하루 종일 땀에 젖은 옷을 '싱가포르 집'(앙뚜앙의 집이지만..)으로 가서 갈아 입고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앙뚜앙은 집에 있을까. 서울이든 싱가포르든 집에 가는 길은 즐겁다.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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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여행기] 쇼핑몰에 운하가!

싱가포르 여행기 2017.07.12 18:05 Posted by 양을쫓는모험님

카야잼의 달콤함을 입 안 가득 머금고 우리는 싱가포르 지하철 MRT(Mass Rapid Transit)를 탔다. 서울 지하철보다 여유로웠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서 그럴까. 각양각색의 승객들이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부분 여행객들로 보였다. 생김새는 달라도 행선지는 아마 같았으리라. 바로 싱가포르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호텔 마리나 베이 샌즈로!


빨간색 라인에서 주황색 라인으로 갈아타고 베이프런트 역에서 내렸다. 대형 쇼핑몰이 있다더니  역시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헉...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놀라웠다. 에메랄드 빛 운하 위에 배가 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 왔을 뿐인데, 마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와 있는 듯했다. 동상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참을 운하를 왔다갔다 하는 배를 바라봤다. 배에 탄 사람들은 서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바빴다. 운하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운하라니, 신선한 충격이다. '운하'라는 말에 정말 충격적이었던 '한반도 대운하' 주장이 잠시 떠오르기도 했지만.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지하에 자리 잡은 쇼핑몰 '더 숍스'는 오차드 로드의 쇼핑몰과 다른 차원의 쇼핑몰이었다. 


운하를 보며 차 한잔~채광 좋은 쇼핑몰


"정말 다른 세상 같아!"


아내가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내 손을 잡아 앞으로 끌어 당겼다. 지하2층부터 지상1층까지 300여 개의 가게들이 화려한 간판을 걸고 있다고 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며 쇼핑몰을 둘러봤다. 노천카페처럼 운하를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곳도 보였다. 끈적한 더위를 피하기에는 최고였다.


해가 질 때까지 '탐험'을 하고 싶은 마음과 뭐라도 사고 싶은 욕망을 꾹 참고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날씨는 끈적했지만, 다행히 햇살은 헤이즈를 뚫고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푸른 야자수 아래 연꽃이 가득한 뜰이 예뻤다. 그 뒤로 서 있는 고층 빌딩 숲이 병풍 같았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의자에 앉아 연꽃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고 있었다. 


고층 빌딩이 병풍 같았다


연꽃으로 채워진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앞뜰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을 등지고 나와 오른쪽 방향으로 산책을 시작했다. 여기도 대형 연꽃이 피었다. 연꽃 모양의 '아트 사이언스 뮤지엄'이었다. 뮤지엄을 지나 다리를 건너자 드디어 거대한 마리나 베이 샌즈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상 200m 위 꼭대기인 스카이 파크는 하늘을 향해 항해를 시작할 것만 같은 크루즈처럼 보였다. 저 위에 수영장이 있다고 하는데 투숙객을 위한 공간이란다. '앙뚜앙 호텔'에도 수영장이 있으면 좋으련만. 멋진 건축물을 볼 때마다 '정말 인간의 한계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빨리 반대편으로 건너가자. 랜드마크의 전체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연꽃 모양의 아트 사이언스 뮤지엄


금방이라도 날아 오를 것 같은 스카이 파크


싱가포르 플라이어라고 불리는 관람차와 과일 두리안을 닮은 에스플러네이드를 눈에 담고 나니 사자 얼굴의 동물상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입에서 물줄기를 시원하게 뿝어내고 있었다. 대형 멀라이언(Merlion)상이었다. 싱가포르의 마스코트라고 했다. 사자 머리에 물고기 몸을 하고 있는 '퓨전'스타일이었다. 쉽게 볼 수 없는 '스타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인증샷 찍기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우리도 그 경쟁에 합류했다. 물줄기를 입안으로 넣는 '착시 인증샷'을 시도한 건 비밀이다.


눈 앞에 펼쳐진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파노라마


한참을 웃으며 멀라이언의 물줄기와 밀당을 했다. 그제서야 눈 앞에 마리나 베이 샌즈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배 모양 우주선의 정박, 그리고 연꽃 모양의 기지. 


'자, 헤이즈가 걷히면 출동한다! 출동 태세를 유지하도록!'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멀라이언


멀라이언 인증샷 놀이에 푹 빠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물줄기 앞에서는 모두 다 아이가 되나 보다. 아니, 나의 공상을 엿들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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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즈가 그대로네."


앙뚜앙의 풀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오전에는 헤이즈가 덜한 편이야." 

"응, 얼른 준비하고 돌아다녀야지!"


어쩔 수 없었다. 헤이즈 때문에 싱가포르에 와서 '방콕'할 수는 없는 일. 우리는 프랑스 대사관에 볼 일을 보러 가는 앙뚜앙의 콜택시를 얻어 타고 보타닉 가든(Botanic Gardens)으로 향했다. 네모난 아파트 건물들이 심심하게 서 있었다. 거리 곳곳에서 공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를 걸어보면 알겠지만, 싱가포르는 정말 깨끗해."

"싱가포르 거리는 깨끗하기로 유명하잖아. 껌만 씹어도 벌금을 낼 정도니까."


앙뚜앙과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가 우리는 보타닉 가든 앞에서 내렸다. '친절한 남자' 앙뚜앙은 심심하면 연락하라면서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나뭇잎 모양의 회색빛 철문 너머로 '푸른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점령 당시 만들어진 보타닉 가든은 정원보다 수목원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 같았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열대 기후의 식물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거대한 잎 사이로 알록달록 꽃들이 사람들을 유혹했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은 당장 몸을 던져 구르고 싶게 만들었다. 산책과 피크닉하기에 정말 좋을 것 같았다. '백조의 호수'에서는 백조 한 마리가 우아한 자태를 뽑내고 있었다. 


도심 속 휴식 공간 보타닉 가든.


보타닉 가든 안에는 특색에 따라 분류된 작은 정원들이 존재했다. 두세시간은 있어야 전체를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다양한 식목과 건축물, 역사적인 특징을 인정받아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도심에 이런 곳이 있다니. 부러웠다. 2천여 종 6만 포기의 난초를 볼 수 있는 '내셔널 오키드 가든'을 제외하고는 다른 곳은 무료로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이제는 움직일 시간. 속세를 벗어나 이 '푸른 세상'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누르고 밖으로 나왔다. 꿈을 꾼 듯했다. 뿌연 하늘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오차드 로드(Ohchard Road)로 향했다. 앙뚜앙의 말처럼 거리는 정말 깨끗했다. 형광색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가 바람을 뿜어내는 기계로 인도 위 낙엽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시원한 음료수가 그립다. 하늘로 쭉쭉 뻗은 잎이 무성한 가로수가 싱가포르의 기후를 떠올리게 했다.


보타닉 가든을 나와 오차드 로드로 가는 길. 열대기후 가로수가 인상적이다.


서울의 명동으로 불리는 오차드 로드에는 쇼핑몰이 몰려 있었다. 삼삼오오 쇼핑백을 손에 든 외국인들이 지나가나 싶더니 도로 위 관광객을 태운 2층짜리 투어 버스가 쌩 달려간다. 명품 브랜드들이 저마다 매혹적인 모델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췄고, 다양한 조형물과 전시물이 눈길을 잡아 당겼다.



세븐일레븐에서 유심카드를 사서 끼우고 쇼핑몰 몇 군데를 돌아봤다. 쇼핑에 자신이 없는 터라 별 감흥이 없었다. 아내도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앙뚜앙이 끓여준 홍차 한 잔만 먹고 나왔더니 속이 허했다. 열량을 보충해야 했다. 한 쇼핑몰에 있는 카야 토스트(Kaya Toast) 가게에 들어갔다. 카야 토스트는 영국 선박에서 일하던 중국 하이난 지방 노동자들이 영국 식민지였던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 정착한 뒤 새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가게 안은 조용했다. 한 서양 여성이 싱가포르 지도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바쁜 사람인양 곧바로 카야 토스트를 주문했다. 바삭한 토스트와 수란, 커피가 나오는 세트에 카야잼을 바른 부드러운 '스팀 식빵'을. 우리 돈으로 6천원이 채 안 됐다. 


"아~달콤해!"


고소하고 달콤한 카야토스트.


'스팀 식빵'은 부드럽고, 토스트는 바삭.


한 입 베어먹은 토스트는 정말 고소하고 달콤했다. 카야잼과 버터가 바삭한 토스트의 식감과 잘 어울렸다. 찜통에 살짝 데워낸 식빵과 카야잼도 맛있었다. 코코넛밀크, 계란, 판단잎 등 천연재료로 만든 카야잼은 듣던대로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간장을 살짝 뿌린 수란에 토스트를 찍어 먹는 것도 환상적이었다. 거기다가 달달한 커피까지. 모든 걱정과 슬픔이 다 사라지는 듯했다.


아, 왜 우리는 지금까지 딸기잼만 먹고 살았단 말인가! 고개를 저으며 나머지 토스트를 입 안으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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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한 싱가포르 밤공기가 폐로 밀고 들어온다. 무겁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가 싶더니 기분이 좋아진다. 해방감 때문일까. 앙뚜앙이 능숙하게 택시를 잡았다. 낡은 토요타 세단이었다. 행선지는 앙뚜앙의 집. 고맙게도 앙뚜앙 부부는 우리에게 남는 방을 하나 내줬다. 몇 번 사양을 해봤지만, 앙뚜앙은 'Please'라는 단어까지 쓰며 기어이 호의를 베풀었다. 사실 우리는 앙뚜앙의 공항 마중도 사양했었다. 


"앙뚜앙, 피곤해 보이네?"

"응, 타이페이로 출장갔다가 오늘 아침에 왔어."


타이페이는 우리도 다녀왔다. 올해 설연휴 때다. 자정께 청주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비몽사몽 타이페이로 날아갔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찾아간 가게 중에 문을 닫은 곳도 있었다. 대만 사람들도 중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건물마다 달려 있는 양 장식과 길가에서 자꾸 뭔가를 태우는 사람들이 일깨워주기 전까지 말이다.





분위기 있는 앙뚜앙의 집.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하늘은 흐렸다. 아니, 구름이 낀 정도가 아니라 뭔가 뿌연 막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기묘했다. 마치 마법의 성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고 있는 것 같았다. 카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DJ의 밝은 목소리가 우리를 현실 속으로 잡아 당겼다.


"헤이즈야. 이렇게 심할 줄 몰랐네. 인도네시아에서 숲을 태운 연기가 싱가포르랑 말레이시아로 날아와서 이렇게 흐린 거야. 아무 것도 안 보여."


인도네시아에서 날아온 연기라니. 내 머릿속에 맴돌던 신비로운 상상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앙뚜앙은 건기인 지금 인도네시아에서는 용지를 확보하려고 땅을 개간한다고 했다. 싱가포르 정부와 말레이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정부에 항의를 하고 있지만, 소용이 없단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바랄 수밖에.


분위기 있는 앙뚜앙의 집 조명


헤이즈에 겁에 질린 듯 전속력으로 달리던 택시는 20분여 분만에 고속도로를 나와 속도를 줄였다. 티옹 바루(Tiong Bahru)라는 거리였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지역이라고 했다. 택시에서 내려 둘러보니 3층짜리 하얀 건물이 조용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앙뚜앙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낑낑대며 올라갔다. 아내의 캐리어는 앙뚜앙이 들어줬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앙뚜앙의 아내 오드는 친구들과 인도네시아 여행 중이었다. 내일 늦은 밤에 돌아온다고 했다. 앙뚜앙의 신혼집은 예술이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어둠을 즐기는 듯한 조명 아래 무너져 내릴 듯한 소파와 책을 가득 품고 있는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는 커다란 날개를 가진 팬이 춤추고 있었다. 시원한 타일 바닥이 축축한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비밀스런 카페에 들어온 듯했다. 


호텔 같았던 손님방.


우리가 일주일 동안 머물 방인 '손님방'. 하얀 시트를 덮은 침대와 튼튼해보이는 옷장이 다소곳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라색 꽃과 향초도 눈에 들어왔다. 동그란 탁자 위에는 싱가포르 안내 책자가 놓여 있었고, 아래에는 생수가 있었다. 집 열쇠도 보였다. 이쯤되면 '앙뚜앙 호텔'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너무 예쁘다! 예술이야~"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저녁 먹으러 가자!"


인적이 드문 거리는 쓸쓸했다. 앙뚜앙이 헤이즈를 뚫고 앞장섰다. 늦인 시간인데도 더웠다. 가을에서 여름으로 시간여행을 온 셈이니까. 발걸음을 재촉해 근처 마켓 건물로 들어간 우리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호커 센터(Hawker Centre)였다. 각 나라의 음식을 착한 가격에 만날 수 있는 푸드코트였다. 거리에 인적이 드물다 했더니 수십 개의 가게 중에 불을 켠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앙뚜앙에게 메뉴 선택을 맡겼다. 앙뚜앙은 사탕수수를 압축기에 짜낸 연두색 음료수를 받아오더니 곧바로 건너편 가게에서 중국식 볶음면을 주문했다. 서로 계산을 하려고 실랑이를 잠깐 벌이기도 했지만, 승자는 '논리정연한' 앙뚜앙이었다.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 싱가포르라고!"


호커센터 중국 볶음 국수가게.


사탕수수 음료와 볶음 국수.


달콤한 사탕수수 음료와 짭짜름한 볶음 국수는 찰떡궁합이었다. 둘 다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싱가포르에서의 '첫끼'였다. 앙뚜앙이 싱가포르에서 볼만한 곳을 읊어댔다. 브리핑 실력이 최고라고 감탄은 했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자장가가 울러펴지고 있었다. 우선 자자. 아직 녹지 않은 음료수 얼음을 입안에 털어넣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싱가포르의 밤이 깊어졌다. 헤이즈도 쉬러 갔을까. 달빛이 아까보다 환하다. 앙뚜앙은 밀린 일을 처리하겠다며 노트북을 펼쳤고,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기도했다. 내일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제발...


앙뚜앙 집이 있는 3층짜리 오래된 티옹 바루 주택과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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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6.01.13 0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갑니다.
    늘 행복하세요


싱가포르 창이공항.

"정호!"

출국장 게이트 앞 앙뚜앙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보다 더 피곤해보였지만, 매력적인 미소는 그대로였다. 우리 셋은 잠시 부둥켜 안았다. 마침내 싱가포르에 온 것이다. 




앙뚜앙은 3년 전부터 알게 된 프랑스 사람이다. 그동안 회사일 때문에 연락을 주고 받다가 친구가 됐다. 그가 서울로 출장올 때마다 만났다. 그는 파리에 살다가 결혼한 뒤 싱가포르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시아 지역을 맡고 있어서 출장이 잦았다. 서울은 물론 도쿄, 타이페이, 뉴델리, 홍콩 등 여러 도시를 오갔다. 마른 체형에 우뚝 솟은 코가 날카로운 인상을 줬지만, 속마음은 그 누구보다 푸근했다. 싱가포르에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오지 않았을 것이다.

"비행은 어땠어? 피곤하지?"

"경유하느라 오래 걸렸지만 괜찮아."


싱가포르 창이공항 인상적인 내부.

싱가포르 창이공항의 인상적인 내부.

나와 아내는 베트남 호치민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싱가포르에 왔다. 9시간이나 걸렸다. 경유 일정이라 표값이 쌌다. 저렴한 가격만이 아니었다. 호치민이란 사실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호치민은 6년 전 첫 배낭여행지였다. 잊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호치민 데탐 거리의 열기와 냄새를 떠올릴 수 있다. 커다란 배낭에 매달린 나를 적셨던 태양과 술래잡기하듯 꼬리의 꼬리를 물었던 오토바이들 그리고 매캐한 매연과 코를 지르던 담배연기가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나를 열사병에서 구해준 사이공 맥주도 빼놓을 수 없다.


비행기 창문 너머 베트남 호치민.


6년만에 호치민 땅을 밟았다. 공항이긴 했지만... 비행기 안에서 호치민의 스카이라인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휴대폰에 비행기 창문 너머 호치민을 담았다. 창가 자리 베트남 아저씨에게 '자리 좀 바꿔달라'고 말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팔을 있는 힘껏 뻗어 호치민을 담았다. 6년 전 나는 어디에 있을까. 아직도 데탐 거리를 누비고 있을 나를 휴대폰에 담았다.


호치민 공항 PP라운지에서 바라본 모습.


자석에 이끌리듯 고도를 낮추던 비행기가 활주로에 미끄러졌다. 열린 문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듯이 열기가 얼굴을 할퀸다. 내리쬐는 햇살이 반갑다. 느릿느릿 버스는 공항청사 앞에 승객들을 뱉어냈다. 

2시간이 주어졌다. 예전보다 화려해진 면세점을 지나 PP 라운지에 자리를 잡았다. 편안한 소파와 아늑한 분위기가 낯설다. 한쪽에 베트남답게 쌀국수가 마련돼 있었다. 호치민 길가 목욕탕 의자에 앉아 후루룩 후루룩 국수를 먹던 라울과 스캇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서로에게 말동무가 되어 주던 친구들이 그립다. 


호치민 아프리콧 라운지(Apricot Lounge) 내부 모습.


즉석 쌀국수가 준비되어 있다.


즉석 쌀국수가 준비되어 있다. 물을 부어서 전자렌지에 돌리면 된다.

나에게 호치민은 더 이상 호치민이 아니다. '나의 호치민'이다. 내가 걸었던 길과 마주쳤던 사람들이 모여 나만의 도시를 창조해낸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나의 여행은 곧 나의 도시다. 내가 경험한 호치민이 나에겐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호치민이다. 마치 '어린왕자'의 여우가 그에게 단 한 마리밖에 없는 여우인 것처럼.

냉장고에서 사이공 맥주캔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사이공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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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레벨33에서 야경에 취하다

나의 이야기 2015.10.06 10:27 Posted by 양을쫓는모험님





33층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며 바라본 마리나베이 샌즈의 레이져쇼. 

이보다 더 황홀한 야경이 있을까.


맥주에 취하기 전에 황홀한 야경에 취해버렸습니다.


함께 감상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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