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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했던 중국 서호의 해질녘 풍경

늦겨울 상하이 푸동 공항 버스터미널은 생기가 없었다. 초라한 매표소도, 무표정한 사람들도 재미 없어 보였다. 활기가 넘쳤던 공항 건물 안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버스들만이 있는 힘껏 울부짖고 있었다.

얼른 버스를 타고 갑갑한 터미널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전혀 당황해 하지 않았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니까! 매표소 직원에게 검지 손가락을 편 채로 "항저우"라고 말해 손쉽게 구입한 버스표를 들고 내 옆에서 부동 자세로 서 있던 청년에게 어떤 버스를 타야 되냐고 물어봤다.

잠시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청년은 뚜이부치 어쩌고 하더니 저만치 가버렸다. 세계 공용어 영어가 안 통할 줄이야. 발음이 안 좋았나. 결국 항저우에 살고 있는 중국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터미널 근처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공중전화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친구의 전화번호를 건네며 전화를 부탁했다. 알고 있던 중국어 단어 '디엔화'(전화)까지 말하면서.

중국 상하이 푸동 공항 장거리 버스터미널.


버스터미널 매표소 쪽 모습.


쪽지에 적힌 친구의 전화번호를 받은 아저씨는 고개를 그떡이며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는 휴대폰에 대고 몇 마디 하더니 나를 바꾸어줬다.

"정호!"
"리! 잘 지냈어? 여기 상하이야! 버스 타는 방법을 잘 몰라서 도움을 구했어."
"잘했어~ 그 아저씨한테 설명했으니까 그 아저씨랑 같은 버스 타고 오면 돼."

휴우, 다행이었다. 그 아저씨도 항저우로 가는 길이란다. 항저우에서 내리면 리의 남편이 데리러 온다고 한 것도 정말 잘됐다. 전화를 끊고 아저씨를 따라 버스를 탔다. 무거운 배낭을 빈 자리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니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항저우 시내 건물 모습.


버스는 고속도로를 따라 신나게 달렸다. 상하이와 항저우를 연걸하는 도로 주변은 우리나라 교외 모습과 비슷했다. 푸른 들판과 듬성 듬성 서 있는 건물이 차창 밖으로 흘러갔다. 아저씨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지루한 시간을 달래고 싶어지만,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서 포기했다.

그냥 모자란 잠을 보충할 수밖에. 다 내 탓이었다. 고등학교 제2외국어 시간에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내 탓이었다. 그 수업시간에 중국어 공부를 하지 않고 나는 무얼 했을까. 3년을 배웠는데 생각나는 건 나의 이름 석자와 간단한 회화 정도였다.

양과 리가 잡아준 숙소 모습.

생각보다 깔끔했던 방.

그렇게 두시간 남짓 달렸을까. 앞 자리에 있던 아저씨가 비몽사몽하던 나를 툭툭 친다. 버스는 어느새 항저우에 들어와 있었다. 우리나라의 7,80년대 모습 같기도 하면서 세련된 느낌도 들었다. 버스는 살구색 아파트를 지나 복잡한 거리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아저씨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데 우리 앞으로 은색 승용차가 한 대 멈춰섰다. 안경 낀 젊은이가 차에서 내리더니 나에게 조심스럽게 "정호?"라고 물었다. 리의 남편 양이었다. 아저씨와 헤어지고 양의 차에 올라 숙소로 달렸다.

호숫가에 앉아 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메신저에서 만난 리에게 항저우로 놀러간다고 했을 때 리는 자신이 숙소를 마련해주고 싶다고 했었다.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사양했지만, 중국인이 친구를 대하는 예의를 따르라는 리의 말에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차는 금세 호수 옆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 호수가 바로 그 유명한 서호(西湖)였다. 유명한 관광코스라고 하더니 호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양에게 호수가 아름답다고 했더니 양은 웃으면서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호수라고 말했다. 그의 말 속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고요한 호수 위로 붉은 빛이 내려 앉았다.


숙소에 나를 내려준 양은 내일쯤 다같이 저녁을 먹자는 말을 남기고 일터로 돌아갔다. 해가 저물어 가는 늦은 오후였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숙소에서 카메라만 챙겨 나왔다. 숙소는 호수와 가까웠다. 20미터만 걸어 나가니 고요한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해질녘 평화로운 서호의 모습.


무얼 할까 하다가 호숫가에 앉아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들 옆으로 가서 앉았다.  왜 사람들이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바라보는 서호의 모습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평화였다. 태양의 고도가 점점 낮아질 수록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 근심과 걱정이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황홀해서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서호의 해질녘 풍경.


가만히 해질무렵 얼굴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햇빛을 느끼며 들릴 듯 말 듯하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과 붉은 태양을 온 몸에 품어 버린 호수를 바라봤다.  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희미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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