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한 싱가포르 밤공기가 폐로 밀고 들어온다. 무겁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가 싶더니 기분이 좋아진다. 해방감 때문일까. 앙뚜앙이 능숙하게 택시를 잡았다. 낡은 토요타 세단이었다. 행선지는 앙뚜앙의 집. 고맙게도 앙뚜앙 부부는 우리에게 남는 방을 하나 내줬다. 몇 번 사양을 해봤지만, 앙뚜앙은 'Please'라는 단어까지 쓰며 기어이 호의를 베풀었다. 사실 우리는 앙뚜앙의 공항 마중도 사양했었다. 


"앙뚜앙, 피곤해 보이네?"

"응, 타이페이로 출장갔다가 오늘 아침에 왔어."


타이페이는 우리도 다녀왔다. 올해 설연휴 때다. 자정께 청주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비몽사몽 타이페이로 날아갔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찾아간 가게 중에 문을 닫은 곳도 있었다. 대만 사람들도 중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건물마다 달려 있는 양 장식과 길가에서 자꾸 뭔가를 태우는 사람들이 일깨워주기 전까지 말이다.


분위기 있는 앙뚜앙의 집.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하늘은 흐렸다. 아니, 구름이 낀 정도가 아니라 뭔가 뿌연 막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기묘했다. 마치 마법의 성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고 있는 것 같았다. 카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DJ의 밝은 목소리가 우리를 현실 속으로 잡아 당겼다.


"헤이즈야. 이렇게 심할 줄 몰랐네. 인도네시아에서 숲을 태운 연기가 싱가포르랑 말레이시아로 날아와서 이렇게 흐린 거야. 아무 것도 안 보여."


인도네시아에서 날아온 연기라니. 내 머릿속에 맴돌던 신비로운 상상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앙뚜앙은 건기인 지금 인도네시아에서는 용지를 확보하려고 땅을 개간한다고 했다. 싱가포르 정부와 말레이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정부에 항의를 하고 있지만, 소용이 없단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바랄 수밖에.


분위기 있는 앙뚜앙의 집 조명


헤이즈에 겁에 질린 듯 전속력으로 달리던 택시는 20분여 분만에 고속도로를 나와 속도를 줄였다. 티옹 바루(Tiong Bahru)라는 거리였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지역이라고 했다. 택시에서 내려 둘러보니 3층짜리 하얀 건물이 조용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앙뚜앙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낑낑대며 올라갔다. 아내의 캐리어는 앙뚜앙이 들어줬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앙뚜앙의 아내 오드는 친구들과 인도네시아 여행 중이었다. 내일 늦은 밤에 돌아온다고 했다. 앙뚜앙의 신혼집은 예술이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어둠을 즐기는 듯한 조명 아래 무너져 내릴 듯한 소파와 책을 가득 품고 있는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는 커다란 날개를 가진 팬이 춤추고 있었다. 시원한 타일 바닥이 축축한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비밀스런 카페에 들어온 듯했다. 


호텔 같았던 손님방.


우리가 일주일 동안 머물 방인 '손님방'. 하얀 시트를 덮은 침대와 튼튼해보이는 옷장이 다소곳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라색 꽃과 향초도 눈에 들어왔다. 동그란 탁자 위에는 싱가포르 안내 책자가 놓여 있었고, 아래에는 생수가 있었다. 집 열쇠도 보였다. 이쯤되면 '앙뚜앙 호텔'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너무 예쁘다! 예술이야~"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저녁 먹으러 가자!"


인적이 드문 거리는 쓸쓸했다. 앙뚜앙이 헤이즈를 뚫고 앞장섰다. 늦인 시간인데도 더웠다. 가을에서 여름으로 시간여행을 온 셈이니까. 발걸음을 재촉해 근처 마켓 건물로 들어간 우리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호커 센터(Hawker Centre)였다. 각 나라의 음식을 착한 가격에 만날 수 있는 푸드코트였다. 거리에 인적이 드물다 했더니 수십 개의 가게 중에 불을 켠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앙뚜앙에게 메뉴 선택을 맡겼다. 앙뚜앙은 사탕수수를 압축기에 짜낸 연두색 음료수를 받아오더니 곧바로 건너편 가게에서 중국식 볶음면을 주문했다. 서로 계산을 하려고 실랑이를 잠깐 벌이기도 했지만, 승자는 '논리정연한' 앙뚜앙이었다.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 싱가포르라고!"


호커센터 중국 볶음 국수가게.


사탕수수 음료와 볶음 국수.


달콤한 사탕수수 음료와 짭짜름한 볶음 국수는 찰떡궁합이었다. 둘 다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싱가포르에서의 '첫끼'였다. 앙뚜앙이 싱가포르에서 볼만한 곳을 읊어댔다. 브리핑 실력이 최고라고 감탄은 했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자장가가 울러펴지고 있었다. 우선 자자. 아직 녹지 않은 음료수 얼음을 입안에 털어넣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싱가포르의 밤이 깊어졌다. 헤이즈도 쉬러 갔을까. 달빛이 아까보다 환하다. 앙뚜앙은 밀린 일을 처리하겠다며 노트북을 펼쳤고,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기도했다. 내일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제발...


앙뚜앙 집이 있는 3층짜리 오래된 티옹 바루 주택과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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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기자가 쓴 라오스 종단 여행기 1권 '일탈 라오스 쉼표'

박정호 기자가 쓴 라오스 종단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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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6.01.13 0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갑니다.
    늘 행복하세요

[싱가포르 여행기] 가는 길 - 사이공을 마시다

싱가포르 여행기 2015.11.08 18:38 Posted by 오마이뉴스 박정호 기자


싱가포르 창이공항.

"정호!"

출국장 게이트 앞 앙뚜앙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보다 더 피곤해보였지만, 매력적인 미소는 그대로였다. 우리 셋은 잠시 부둥켜 안았다. 마침내 싱가포르에 온 것이다. 

앙뚜앙은 3년 전부터 알게 된 프랑스 사람이다. 그동안 회사일 때문에 연락을 주고 받다가 친구가 됐다. 그가 서울로 출장올 때마다 만났다. 그는 파리에 살다가 결혼한 뒤 싱가포르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시아 지역을 맡고 있어서 출장이 잦았다. 서울은 물론 도쿄, 타이페이, 뉴델리, 홍콩 등 여러 도시를 오갔다. 마른 체형에 우뚝 솟은 코가 날카로운 인상을 줬지만, 속마음은 그 누구보다 푸근했다. 싱가포르에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오지 않았을 것이다.

"비행은 어땠어? 피곤하지?"

"경유하느라 오래 걸렸지만 괜찮아."


싱가포르 창이공항 인상적인 내부.

싱가포르 창이공항의 인상적인 내부.

나와 아내는 베트남 호치민에서 비행기를 갈아탔고 싱가포르에 왔다. 9시간이나 걸렸다. 경유 일정이라 표값이 쌌다. 저렴한 가격만이 아니었다. 호치민이란 사실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호치민은 6년 전 첫 배낭여행지였다. 잊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호치민 데탐 거리의 열기와 냄새를 떠올릴 수 있다. 커다란 배낭에 매달린 나를 적셨던 태양과 술래잡기하듯 꼬리의 꼬리를 물었던 오토바이들 그리고 매캐한 매연과 코를 지르던 담배연기가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나를 열사병에서 구해준 사이공 맥주도 빼놓을 수 없다.


비행기 창문 너머 베트남 호치민.


6년만에 호치민 땅을 밟았다. 공항이긴 했지만... 비행기 안에서 호치민의 스카이라인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휴대폰에 비행기 창문 너머 호치민을 담았다. 창가 자리 베트남 아저씨에게 '자리 좀 바꿔달라'고 말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팔을 있는 힘껏 뻗어 호치민을 담았다. 6년 전 나는 어디에 있을까. 아직도 데탐 거리를 누비고 있을 나를 휴대폰에 담았다.


호치민 공항 PP라운지에서 바라본 모습.


자석에 이끌리듯 고도를 낮추던 비행기가 활주로에 미끄러졌다. 열린 문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듯이 열기가 얼굴을 할퀸다. 내리쬐는 햇살이 반갑다. 느릿느릿 버스는 공항청사 앞에 승객들을 뱉어냈다. 

2시간이 주어졌다. 예전보다 화려해진 면세점을 지나 PP 라운지에 자리를 잡았다. 편안한 소파와 아늑한 분위기가 낯설다. 한쪽에 베트남답게 쌀국수가 마련돼 있었다. 호치민 길가 목욕탕 의자에 앉아 후루룩 후루룩 국수를 먹던 라울과 스캇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서로에게 말동무가 되어 주던 친구들이 그립다. 


호치민 아프리콧 라운지(Apricot Lounge) 내부 모습.


즉석 쌀국수가 준비되어 있다.


즉석 쌀국수가 준비되어 있다. 물을 부어서 전자렌지에 돌리면 된다.

나에게 호치민은 더 이상 호치민이 아니다. '나의 호치민'이다. 내가 걸었던 길과 마주쳤던 사람들이 모여 나만의 도시를 창조해낸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나의 여행은 곧 나의 도시다. 내가 경험한 호치민이 나에겐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호치민이다. 마치 '어린왕자'의 여우가 그에게 단 한 마리밖에 없는 여우인 것처럼.

냉장고에서 사이공 맥주캔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사이공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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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기자가 쓴 라오스 종단 여행기 1권 '일탈 라오스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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